'2013/03/13'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3.03.13 -

-

|

 

병원 생활이란게

처음엔 기약없는 기다림과 결과를 알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환자도 보호자도 예민할대로 예민해지고 우울하기 마련이지만,

기약없는 기다림에 적응하고, 그 두려움이 결과를 바꾸지는 못한다는,

아주 간단한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부터는

환자도 보호자도 그 생활에 적응하게 되는 것 같다.

 

병원밥 지겨워하는 닭고기 요즘따라 매운 걸 찾는다.

그렇다고 다섯명이 호주사람인 6인 병실에 김치냄새 풍길 수는 없기에

떡볶이, 오이무침 같은 걸 싸가게 된다.

 

오늘은 그야말로 7첩반상에 김까지 싸먹는 걸 보시던 병실 할머니들이

우리 음식에 호기심반 신기함반으로 반응하시고.

지겨운 병실생활 할머니들이라고 다르시겠나 싶어

할머니들이랑 병원 산책도 가고

마리아 할머니가 사주시는 아이스크림도 먹고.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들도 살아보시겠다고

살을 찢는 수술을 하고 약을 챙겨드시고 하는데

나도 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들이 들려주시는 영국왕실 이야기도 재미있고

도로공사 욕하시는 것도 너무 웃기고

무엇보다 할머니들, 너무 너무 귀여우시다.

자주 찾아오는 내게 닭고기 씨스터냐고 물으시길래

20년된 오랜 친구예요, 했더니

요즘같은 세상엔 어쩌면 그런 친구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며

보기 좋다고 하셨다.

물론 내가 그런 얘길 들을만큼 요즘 닭한테 신경을 못쓰고 있어

부끄러운 맘 없진 않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

동률옹의 귀향을 들으며 든 생각.

나도 여든살이 되면

저렇게 지혜로워질 수 있을까.

케뉼라를 갈아야 하는데

이미 많이 늙으셔서 성한 혈관도 없고

한번에 혈관 찾기 힘들어 여러번씩 찔러야 하는데도

그 평온한 얼굴의 마리아 할머니.

 

그렇게 지혜로워지기가 힘든거면

그냥 할머니들처럼 귀여워지기라도 했음 싶은 마음이 들었다.

ㅋㅋㅋㅋㅋ

 

아. 숙제하자.

 


And
prev | 1 | next